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봉오동 전투 (문단 편집) === 결과 === 일본군은 "독립군을 20여 명을 죽이고 아군(일본군)은 1명이 죽었다"고 주장했다. '간도' 국자가에 있었던 일본 영사분관에 소속된 와쿠이 경부가 이 사건을 조사했는데 결과는 약간 달랐다. 와쿠이 경부가 조사한 '복명서'에 따르면 "아군(일본군)의 전사 병졸 1명, 부상 5명. 7명 또는 10여 명이라고 하는 자도 있다"고 한다. 일본 측의 사카이 간도 총영사 대리 보고서나 야스카와 소좌 보고서를 교차 검증하면 일본군은 사상자 10명 안팎 정도로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야스카와 소좌의 전사상표에는 사망자는 2등졸 호리이 시게쿠니(堀井茂邦)이며 부상자는 1등졸 가지우라 긴지로(梶浦銀次郞)외 경찰 1명이라고 나와있다.] 그러면 일제가 죽였다고 주장하는 "20여 명", 그리고 독립신문에 나온 "시체 24"는 무엇일까? 그 인원의 대다수는 민간인 사망자였다. 당시 항일군들은 전투를 벌인 뒤 마을을 정리했는데 마을에서는 "남동의 남녀노소 24명의 시체를 처리하고 부상자 2명이 있었다"고 한다. 일본군이 무차별 사격을 하며 죽인 민간인들이다. 또 서육린은 "무릇 한민들 촌이면 집집마다 수색하고 사격하여 한민 남녀 17명을 살해하였다."는 증언을 했다. 일본군이 죽였다는 전과의 대부분은 무고한 민간인들이다.[* 박창욱,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연구, 한국사연구 (111), 2000, 115~117] 추격대는 항일 군인들은 잡지도 못하고 엉뚱하게 민간인만 학살하다가 10명 안팎이 다치거나 죽는 뻘짓을 한 것이다. 한편 한국 최초 보도인 6월 10일자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보도에서는 일본군 사상자 12명, 독립군의 피해는 불명이나 버리고 간 유기시체가 12구라고 하였다. 6월 20일자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에도 비슷한 보도를 인용했는지 대동소이하다. 6월 22일 상하이 '독립신문'에서도 비슷하게 "적 사상병 12명. 아군의 손해는 미상하나 시체 24, 그 외에도 상당한 사상자가 있는 것 같다"고 하였다. 6월 20일 공보호외에서는 사상자가 120명이라고 적었지만 6월 24일 독립신문 86호에는 사자(死者)가 120명이라고 바로잡았다.[[https://search.i815.or.kr/contents/newsPaper/detail.do?newsPaperId=DR192006240303|#]] 그러나 같은 날 후속보도에서는 적의 주장이라는 전제 하에 일본군의 사상자가 12명이라고 했다.[[https://search.i815.or.kr/contents/newsPaper/detail.do?isTotalSearch=Y&newsPaperId=DR192006220202|#]] 한편 1920년 6월 23일자 중국 <상해시보>에서는 독립군의 전과가 일본군 사상자 120여명이라는 보도를 냈다.[[http://e-gonghun.mpva.go.kr/portal/url.jsp?ID=PV_JH_0005_002.002.002.034|#]] 이 같이 여러 보도들이 오락가락하다가 12월 25일 새로이 발간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의 [[http://archive.much.go.kr/archive/newspaper/viewArticle.do?pblshId=088#|독립신문 제88호]]에서는 일본군 피해는 전사자 157명, 중상자 200여 명, 경상자 100여 명, 독립군 피해는 전사자 장교 1인, 병원 3인, 중상자 2인 등이라고 발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